'오블리주' 없으면 '노블'이 아니다

입력 2015-05-18 14:39  

(이호영의 삐딱한 시선) 상공인에게도 사회적 의무가 있을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거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유럽 귀족(noble)들의 불문율이었다. 그들의 왕자나 귀족들은 솔선하여 나라와 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다. 국난에 도망가기 바빴던 우리 왕과 양반에게는 없는 전통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조선시대 내내 이어지던 신분체계다. 아직까지 유교적인 모럴과 계급의식이 살아있기에 상공인은 고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신분상 천하게 대우받은 건 사실이다. 상공인을 고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상공인에게 고귀한 의무도 바랄 수 없다. 실컷 천시해놓고는 궁할 때 손 벌리면 누가 기꺼워하겠는가?

오블리주를 ‘오리발’로 일관한 얌생이 양반 귀족들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것은 전적으로 조선의 귀족인 양반 탓이다. 신라부터 조선까지 관직을 지내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살펴보면 대부분 50~60개 명문가 출신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지방 토호(土豪)들이다. 신라나 고려는 세습귀족제였으니 자기 기반을 끔찍이 여겼다. 유럽 귀족과 마찬가지로 지역을 잃으면 끈 떨어진 연 신세와 다름없었으니 목숨을 걸고 영토와 사람을 지켜야 했다. 중세 유럽 봉건 귀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시 영토와 생사를 같이하는 데에서 시작磯?

하지만 조선에 와서 과거제가 확립되면서 가문의 사활은 중앙 관리 배출 유무에 달리게됐다. 여기서 중앙관리란 신분상 귀족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월급쟁이 공무원이다. 대부분 유명 가문 출신이라 박봉임에도 청렴결백했다. 그들 본인이 도덕군자라거나,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시골에 논밭이 수만 평이나 가진 지방 토호다보니 잔돈푼가지고 망신살 뻗힐 일을 피한 것이다.

“짐이 곧 국가”라고 자처하는 왕과 귀족에게는 공사(公私)가 없다. 모든 일이 공적인 업무다. 자기 일에 무한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로 벼슬자리에 나가 출퇴근하는 공무원에게 공사는 확실했고, 관할이나 책임한계 또한 명확했다. 공무원은 직급의 범위에 따라 월급 받은 만큼 일한다. 이게 귀족과 관료의 차이다.

여기에 조선의 비극이 있다. 실상은 귀족이나 다름없는 토호지만 겉으로 보면 월급쟁이 공무원이다. 연고지에서는 무한책임을 져야 하지만 서울에서는 책임한도가 확실하다. 지방이라고 다를 바 없다. 서울 대감님의 관직 높이에 따라 세도가 달라지니 서울의 세력 싸움에만 목을 맸다. 조선에서는 실질보다 명목이 우위를 차지한다. 책임도 의무도 서울 대감님의 직책과 명목에 따라 달라졌다.

이런 형편이니 난(亂)이 닥쳐 양반 관료를 찾아가면 공무원 명함 내놓고 오리발을 내민다. 대충 이런 식이다. 내 분야, 내 관할 아니니 6층의 방재과에 들러 정식으로 서류 접수하고 3층의 도시계획과에 승인을 받으라 한다. 물론 가보면 딴 양반이 딴 소리에 딴 서류를 요구한다. 오늘날이나 다를 바 없이 관료 양반들은 얌생이처럼 단물만 쏙쏙 빼먹고 정작 책임질 일에는 선을 그었던 것이다. 조선의 관료세계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과 달리 조선에서는 전적으로 책임질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제는 오블리주 노블레스다

노블이 없으면 오블리주도 없다. 반대로 오블리주가 없으면 노블이 아니다. 의무도 책임도 없는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절대 고귀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의 대부분 국난에서 왕과 관료들은 도망치기 바쁘고 무능한 관병은 내내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백성들로 조직된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앞장에 서서 싸웠다. 전직관료와 사대부들이 일본에게 나라 팔아먹고 은사금 받아 챙기느라 바빴지만 상공인들은 기업을 일으켜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환란에 앞서서 우리를 지켜줄 왕도 없고 귀족이 없었다. 왕이나 양반은 천한 짓만 골라서 하니 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의무 행하며 고귀해지는 사람은 나타났다. 그렇다. 고귀함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나가야 하는 일이다. 고귀한 행위가 고귀한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고어체)는 옥스퍼드 대학 윈체스터 칼리지의 교훈(校訓)도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중앙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wesyuzna@naver.com(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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